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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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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 못한 말 당신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임의로 빈칸을 채워 넣어야겠다 싶었어 ___ 사랑은 공평하지 않아 사람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럼에도 변함없다. 지는 편 힘겨운 쪽 그 자리가 차라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은. 오랜만에 이별을 앓는 소설을 읽었다 짧고 강렬한 사랑의 반사. ___ 소설은 진해지고 작가님은 순해지는 것 같다. 여전한 응원과 사랑을 보냅니다.
만질 수 있는 생각 118. 단풍 물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고,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모두 가 볼 수는 없다. __ 갈래길이 펼쳐지는 장면은 흐린 날, 차가운 아스팔트 혹은 짙은 비포장 흙바닥의 황량한 이미지였다. 어느쪽을 선택해도 편하지 않을 것 같으며 두려운. 갈래길의 가운데 서서 몸을 돌려 세우는 일을 미루느라 그 황량한 장면이 더 길게 남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숲 속의 갈래길도 겁나는 구석이 없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있고. 그 나무 중에는 고대어를 하는 뿌리 깊은 이도 있을 것이므로, 이제 나의 갈래길은 숲 속으로 내어야겠다. 숲 속에는 두 갈래 길이 있고 몸은 하나이지만 가지 못한 길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즐겁게. __ 아름다운 작품의 탄생기를 듣는 일은 언제나 즐겁지! 아이들을 위하는..
사라진 것들 62. “왜냐면,” 마야는 돌아서서 부엌에서 나가며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라서야.” ___ 한 편 한 편 은근한 매력이 좋았지만, 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안 볼지도 모르는 연인에게 제일 좋아하는 그림을 남기는 식의 다소 어이없는 상황들, 상관없는 독자의 시선에서 뭐지?! 혹은 왜지?! 하는 설정들, 그래야 했나 싶은 순간들이 이상하게도 응 아니야를 외치면서도 등을 반쯤 돌린채 그럴만하지 생각되곤 했다. 어릴 때 나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나간 날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던 아이템인 조끼를 건네던,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가 쇼핑을 하고 포장을 해서 입으라고 내밀었다. 그리고 그만 만나자고. 그는 어이없어 했지만 그것까지 하고 싶었던 ..
리추얼 7. 재미있어야 내 인생이고, 의미있어야 지속가능하다. ___ 작은 일의 반복이 일상에 의미를 더한다면 그리고 그 의미가 나에게 ‘의미’있다면 누가 뭐래도 리추얼이다. 작은 일을 기다리고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반복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소소한 행복 추구위원회의 멤버로서 책의 유명세를 빌어 우리 위원회의 회원이 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중이다.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유명인들, 그들 사이에 있으니 몰라도 알 것 같은 이들의 긴 시간을 채운 리추얼들은 결국 한 사람을 살게한 반복된 일상이다. 행복까지는 각자의 몫이나, 그들 역시 마지막엔 자신의 의미 있는 일상에 ‘감사’하지 않았을까. 재미있는 인생을 선택하고 의미있는 삶이 되도록 성실을 다하면 무지 멋있는 사람이 되고마는 것이다. ___ 어느 때는 ..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마음 속에 넘쳐나는 말들이 혼자 되내이고도 남아돌아, 생각의 속도 말의 속도 글의 속도가 뒤엉킬 때, 아무런 상관않고 편지할 이가 있다면. 생의 축복이다. __ 사랑을 사랑답게 하는 건 기울어진 마음의 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쪽이 얼만큼 더 기울었는지는 사랑하는 사이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랑은 과장되고 격앙되며 희생이 강요되니 극적이다. 다른 사랑은 가만하고 긴밀하며 정성이 필요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어떤 사랑은 밑 빠진 독에 붓는 물이고 다른 사랑은 새어나간 물이 살살 내어둔 물길이다. 특별한 사랑이고 보통의 사랑이다. 사랑은 평생의 화두. 문득, 언제나 사랑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각각의 계절 68. 반희는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었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알려주려는 듯 작게 소리내어 말했다. ___ 스스로에게 소리내어 말하던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스스로에게 꽤 다정하게 군 것이다. ___ 세상은 제각각이니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니 신기하다. 가까이에 있을 것 같은 이야기. 너무 알겠는 이야기들. 나이 들어가는 일이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나이 혼자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억지로 젊고자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는 숫자들만 별개로 번식하는 것 같을 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때도 별거없이 그저 나는 또 하나의 계절을 나고 있을 뿐인 것이겠지.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었다. 주인공의 나이가 몇일까 유독..
트립풀 런던 오래전 런던 여행의 마지막에 내셔널 갤러리가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 여행을 준비하던 나의 바람이었는지 이제는 흐릿해진 장면들만 남은, 그 마저도 자꾸 증발하는 중에도 미술관에 대한 기억은 아직 선명하다. 건물의 기둥, 계단을 숨차게 올라 거대한 문 안으로 들어설 때 그곳의 포근한 공기, 볼륨을 낮춘 발걸음 소리, 실제로 보니 사진에서보다 무지 작아 놀란 작품, 고전 미술이라는 작품들을 잔뜩 가지고 원하면 얼마든지 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시샘, 다 돌아보고 싶은 조급함, 문이 닫도록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나를 새겨 놓고 싶던 무거운 발걸음, 벨라스케스 특별전을 놓친 가벼운 지갑, 그런 기억들. 로또가 되면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그러면 나는 훌쩍 그곳으로 가 한 달 동안 날마다 들락거리고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59. 나는 별 필요도 없는 긴 이야기를 시작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말하며서 길게 끈다. 어느 누구보다도 형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고, 형도 그걸 너무 좋아하고, 나도 그걸 매우 즐기기 때문이다. __ 오늘의 점심 메뉴, 길에서 본 어떤 장면, 책에서 읽은 문장 때문에 떠올린 생각, 카톡으로 전해들은 황당한 소문, 반쯤은 알아듣지 못하는 각자의 직업 관련한 일들, 쿠폰으로 사 마신 커피, 일하면서 만난 사람, 깜박하고 빼먹은 약.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세세하게, 나의 감정과 감상을 더해가며 길고 긴 이야기로 하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다. 가라앉은 마음을 돌보려고 분주하게 떠들게 되는 시간. 그가 형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병에 익숙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