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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506. 남작은 기억이 아니라 습관을 따르는 사람처럼, 주저하지 않고 도로에서 돌아서서 제방을 내려가 과감하게, 하지만 평소처럼 불규칙한 걸음걸이로 이따금 살짝 균형을 잃으며 숲속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출발했다. _ 주인공답게 늦게 등장해 주인공 아니랄까봐 서둘러 사라진 남작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데, 정말 그런가.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만 살 수 없지만세상은 개인을 너무나 가만 안두기도 해.만연체의 위협을 극복하려 연필을 들고 앉아 마침표가 나올 때마다 동그라미를 쳤다. 그 재미도 있었다.긴 문장에 숨차던 소설이 중간쯤엔 읽을만해졌고 몰아쳐 읽기도 했고읽은만큼 잊기도 했다. 정말 제대로 읽어낸 걸까 싶지만 벽돌책 완독만으로 일단 기쁘다. 책장을 덮고나니 기억나는 장면이 적지 않다.그렇게나 길게 말하는 ..
먼 산의 기억 268. 지한기르의 근처 청과물 가게에서 커다란 수박을 사 먹었다. _이전의 책 카프카의 드로잉북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지나고보니 모두 작품의 시작이었다는 마치 옛날 옛적에 같은 기록들은 낭만적이다.과일가게에서 수박을 사먹은 일상이 책의 한 줄이 된다.성실한 기록은 언젠가 기적이 되지.무얼 바라며일기를 쓰고 책이야기를 남기고 다이어리를 펼치는 건 아니지만, 이담에 모여서 무언가 될지도.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자신에게 친절한 게 최고의 친절이야.“ 두더지가 말했습니다. _ 친절을 기대하고사랑을 바라고애정을 구하는가녀린 마음이 있다. 눈동자는 흔들림을 감추지 못하고떨리는 목소리는 말끝을 늘인다. 누군가를 기다리지 말고내가 나를 바라보면지금 바로 친절도 사랑도 애정도 받을 수 있다.두더지도 여우도 말도 아닌 오늘은나와의 우정을 돈독히. 달리고 들어와 개운하게 씻고, 나를 위해 정성껏 식사를 차려낸다. 몸도 마음도 배부른 점심시간😊. 친절은 거창한 일이 아니고나 자신은 가까이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 93.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 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
게으름에 대한 찬양 48. 그럴 경우, 그 순간의 문젯거리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 뿐인 동떨어진 지식(실제로 연관이 있든 그렇게 생각한 것이든 간에) 에서 의외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설사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골칫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_정해진 빗겨나기 위해 문득 깊어져도 좋을 무용한 지적탐구를 내 것인양 누리도록 게으른 일상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그게 다가 아니지만은일단은 다같이 한 번 해보고 얘기하자 얘기하자! 오래전의 문장, 지금 읽어야 했던 글이었다. 하필 지금. 재미있었다. #게으름에대한찬양#버트런드러셀 #송은경옮김 #사회평론중고 서점에서 그이가 골라온 책인데 이 책의 전주인이(겠지) 가름끈을 가지런히 달아두었다. 책갈피나 가름끈을 꼭꼭 챙..
소설가의 마감식 하루 중 그맘 때를 지키는 음식이 있고(모닝커피,3시 커피 그리고 영양제)아끼는 음식을 온전히 누리기위해 비장한 약속을 잡고 (긴 방학 끝에 목동분식 오픈런)맘고생하느라 먹지 못한김에 배부름에 대한 성찰도(뜻밖의 간헐적 단식)식사 준비를 하느라 주방에 가득찬 냄새로 식사를 마치기도(엄마는 요리사)천원짜리 몇 장들고 데이트를 나서고(붕어빵 지도부터 켜시고요)큰 맘 먹고 카드 긁어 한 호사는 두고두고 (한우 오마카세 좋아요)혼자하는 식사는 이 정도로도 맛나지(후추뿌린 소세지 볶음, 노른자 살린 계란후라이에 짭짤한 김과 갓 지은 밥)잃은 입맛을 찾아오는 소울 푸드도 있고하니(비바나폴리의 샐러드의 올리브 오일의 향과 맛)읽다보면 나의 마감식 미감식 즐감식 등을 떠올리느라 읽기를 멈추게 되는 음식 이야기.띵시리즈..
오이디푸스 왕 시간의 뒤엉킴과 감히 예상도 못할 반전에 휘말리며 진실을 찾는 인간은 어리석은가, 그렇기에 인간다운가. 이렇게가 아니면 언제 읽으려나 싶어골라본 소전독서단 3월의 책.
제5도살장 43.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167. 그리고 기타 등등. 그게 바버러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존엄을 빼앗아버리는 것이. —꿈이든 환상이든, 착각이든 시간여행이든 전쟁을 거치고나면 결국 비극이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음에 무뎌진다. 나의 일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까. 풍자도 블랙유머도 고통을 가릴 수 없다. 웃을 수 없다. 전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