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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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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는 마음 32. “저기 봐라.” 어머니믜 손끝을 따라 가보니 하늘에 무지개가 있었다. 어린 성규가 울 때면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성규를 달랬다. 저기 봐라, 하고. 어머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늘 근사한 풍경이 있었다. …… 형이 성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 성규에게 입혀주었다. “선물이야. 이만큼 크라고. 쑥쑥 커서 이거 입으라고.” 그날 성규는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시소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_ 느긋하고 편안한 여덟편의 소설.열 다섯 전후의 청소년, 배구, 만물트럭, 꽈배기, 생일, 할머니, 엄마 그리고 엄마의 부재, 꿈, 사고…… 겹치며 등장하는 소재들 덕분에 떨어져있는 이야기지만 하나의 세계 안에 포근히 든 것 같다. 그 안에서 저마다 다르고, 다르지만 ..
단 한 번의 삶 61. 모든 부모가 언젠가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그 실망은 도둑맞은 신발같은 사소한 사건 때문에도 비롯된다는 것, 그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고, 나처럼 어떤 아이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사소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한다. / 그렇지만 그게 부모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__대신하는 문장. 천 개의 강에 비친 천 개의 달이 있다. 천 개까지 아니어도, 열 개의 나라도 찾으려들면부모라는 강부터 건너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나, 내 안의 어린 아이, 부모로 부터 뻗어나온, 부모를 돌아보아야 하는 그런..
플로렛 농장의 컷 플라워 가든 외2권 SNS에 꽃에 관한 피드가 넘친다. 아름다운 꽃 작품은 물론 꽃을 다루는 유익한 방법에 트렌드, 다양한 강의 홍보에 이르기까지 보란듯이 뜨는 피드들은 엄청났다. 정보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눈은 피로했고 기억에 남는 건 몇몇 이미지 뿐이었다. 그마저도 민들레 홀씨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에 나간 길에 서가에 꽂힌 꽃에 관한 책 3권을 빌렸다. 책에 담긴 꽃 사진과 꽃에 관한 이야기는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그자리 그대로이니 다소 트렌드와 멀지 않을까, 멈춘 정보 아닐까 잠시 그랬다. 하지만 무겁고 두꺼운 책 세 권을 이고지고 오길 너무나 잘했.기대하지 못한 지점에서 배웠고, 천천히 넘기는 동안 즐거웠다. 시간과 정성이 풍성히 담긴 한 권의 책은 귀해. Floret Far..
나의 폴라일지 99. 내 방은 유빙 무리가 잘 보이는 쪽이었고 아침마다 그 풍경을 바라보자면 나조차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존재에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면 그것이 자연을 향할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다워지고 대범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__온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남극의 차가운 바람의 이야기는진하게 보낸 어느 겨울로 나를 데려간다. 볼을 때리는 바람이 시리다 못해 아팠지만 그렇다고 그 바람을 피하고 싶지 않던,거기 있었나 싶던 내몸 속의 혈관이 차갑게 뛰던 경험. 청량함이었다. 물론 남극의 그들이 겪은 바람은 이렇게 감상적일리 없지만 :)그저 하나의 종으로, 비펭귄족으로 남극에 존재하며 조심히 걷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들의 일상을 듣고나니 마치 정화의 의식을 통과한 기분이 든다. 우주의 이야기를 좋..
바움가트너 130. 외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문장을 만드는 데는 큰 노력이 요구되고, 큰 노력은 큰 집중을 요구하며, 문장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구축하려면 하난의 문장에 반드시 다음 문장이 따라와야만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큰 집중이 요구되는데 이는 나에게 며칠이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는 뜻이다. 마치 시계가 기록하는 한 시간이 1분에 불과한 것처럼. 50여 년이 며칠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나니 내 인생이 흐릿하게 한 덩어리로 쏜살같이 흘러가 버린 듯한 느낌이다. 나는 늙었지만, 날들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나의 많은 부분이 아직 젊게 느껴진다. 따라서 손에 연필을 쥘 수 있고 눈앞의 문장을 볼 수만 있으면 여기 도착한 아침 이후 해온 일과를 똑같이 할 생각이다. 마침내 더 할 수 없는 순간이..
빛과 실 162. 5월 1일 대문을 들어서면 라일락 향이 그득하다.- 우리 동네 라일락은 한참 전 부터 먼저 봄이었다. 해가 지면 라일락향이 더욱 짙어지니 밤산책이 자꾸 하고 싶어지고. 멀리 어딘지 모를 거울이 여덟개나 있는 작은 정원이 품는 향기가여기에 닿은 듯하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문과 수상 기념 강연의 원고, 장편을 낳은 이야기, 정원 일기와 시들이 담긴 새 책. 신간이라해도 가만한 목소리에 실려 익숙하게 느껴지고이전의 책이라해도 막 지난밤을 지나온 듯 멀지않다. 한 손에 들리는 작은 책이 한달음에 품으로 들어온다.
우는 나와 우는 우는 75. 차차 두려움은 수그러들었다. 사랑은 때로 힘들었지만, 그것은 그냥 사랑이라는 게 원체 어려운 것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참 어렵다. 이 일의 어려움은 풀기 힘든 문제 앞에 앉았을 때, 포기해도 그만일 때를 넘어선다. 저린 몸이 미지의 끝에 가까이 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따른다. 사랑하는 일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에 있다. 이 이야기는 무겁다, 는 온라인 서점의 리뷰를 보았는데 못내 서운했다. 이 이야기는 무겁지 않다. 다만 어렵다.실패가 패배가 아니듯 이별은 사랑의 팔이자 다리인지도 모른다.열 세개의 우체국 상자를 닫는 은빈과 우를 바라본다. 눈물과 콧물이 섞이도록 웃는 은빈과 우를 그려본다. 나란히 걷고 앞뒤로 흐르는 은빈과 우의 한 때를 담아본다..
새 마음으로 197.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늘 뭉클해지지만, 아마도 그건 기계를 잘 모르는 이들의 기도일 것이다. 어떤 일이 자기 손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게 더이상 없을 때 올리는 게 기도이기도 하니까. 기계를 아는 기장님들은 차분하게 묵묵히 조작할 뿐이다. 그때부터는 모든 게 기장님들의 손에 달렸다. _머리보다도 몸으로 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되새긴다. 주어진 일을 꾸준히 반복하여 자신만의 기술을 갖고, 연륜을 이루는 사람은 위대하다. 성실함이 얼마나 힘있고 귀한 열매인지, 한 사람의 지나온 시간을 그보다 더 정직하게 담을 수는 없다는 것을 실감하며 어른이 된다. 마침 그런 이야기가 담긴 다정한 대화를 책으로 만나 즐겁게 읽었다. 이슬아 작가의 이웃 어른 인터뷰집.어른이라는 단어가 포근하게 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