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다시 읽으면 또 발견될 게 뻔한 오타와 비문을 걱정하기보다 일초라도 빨리 그 사람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간절함이 묻은 편지가 있다.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심정을 나는, 안다.
긴장하지 않고 느슨하게 읽어 내려가다, 이 즈음부터 속도를 내게 되었다.
한눈에 끌리는 무엇인가를 감지하거나, 모른척하던 마음(내 마음이든 상대의 마음이든)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일은 대단한 발견으로부터 시작되기보다 용기있고 솔직하게 인정함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살아갈수록 그토록 필요한 순간인데도, 오늘의 책임 혹은 이미 길들여진 일과 뒤에 숨느라 드문 사건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닌 문장을 바로잡는 이가 퇴고를 포기하고 보낸, 이 메일의 발송 순간이 좋았다.
역시,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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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골목마다 있는 장소들을 제목에 단 소설들이 줄지어 나왔다. 그 장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전부 남이지만 간혹 나이기도 하다. 공감과 위로가 있어 다시 살게 하는 소소한 행복의 가치를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소중하지. 그런데 왜인지 그 설정에 심드렁해졌다.
하지만 사실 책을 고르는 사람, 책 속에 자리 잡고 앉는 사람, 책 속 문장을 탐하는 사람, 책으로 먹고 사는 사람, 갖고 싶은 게 늘 책인 사람, 서점 매대에서 책의 모서리를 맞추어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람을 스쳐 보내기란 쉽지 않은 법. 서둘러 데려와 즐겁게 읽고 책들에 관한 책이 모인 책장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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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길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공평한 배려다.
이 한 문장의 앞뒤로 수천의 일들이 벌어지고 수만의 마음이 요동친다 해도 책이 모두에게 가는 길은 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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