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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2025

우는 나와 우는 우는


75. 차차 두려움은 수그러들었다. 사랑은 때로 힘들었지만, 그것은 그냥 사랑이라는 게 원체 어려운 것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참 어렵다.
이 일의 어려움은 풀기 힘든 문제 앞에 앉았을 때, 포기해도 그만일 때를 넘어선다.
저린 몸이 미지의 끝에 가까이 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따른다.  

사랑하는 일의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에 있다.




이 이야기는 무겁다, 는 온라인 서점의 리뷰를 보았다.
이 이야기는 무겁지 않다. 다만 어렵다.
실패가 패배가 아니듯
이별은 사랑의 팔이자 다리인지도 모른다.

열 세개의 우체국 상자를 닫는 은빈과 우를 바라본다.
눈물과 콧물이 섞이도록 웃는 은빈과 우를 그려본다.
나란히 걷고 앞뒤로 흐르는 은빈과 우의 한 때를 담아본다.  


은빈이 하지 않은 이야기는 큰 괄호 안으로,
적거나 없는채로 담아 두기로 한다.  
은빈의 삶이 은빈을 사랑하고 우의 삶이 우를 사랑하기를
그렇게 응원한다.  










17. 우에 관해 적는 것은 태양을 올려다보는 일처럼 어렵다. 우와 보낸 시간은 뜨거운 볕처럼 내 안의 모든 것을 평등하게 비춰주고 있다. 내 안에서 나고 자란 것들은 모조리 그 빛을 쬐었다. 오 년이 지났는데도 그 빛은 여전히 뜨겁고 눈부셔서 당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우와의 일을 나는 아주 잠깐씩만 들여다본다. 짙은 필름 조각을 들고 태양을 올려다보는 사람처럼. 딴청을 피우고 시간을 끌며. 필름 조각을 겹겹이 포개고 여러 차례 눈을 깜빡이며. 실은 대개 올려다보지조차 못하고 그 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들만 망연히 바라본다. 여기 쓰인 것은 내가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쓰기에 실패한 것들이며, 쓰고자 했던 것의 그림자이거나 흔적이거나 사라짐이다.



85. 잃어버린 이야기들이 살았던 마음의 빈칸들을 밤마다 열었다 닫으며 생각한다. 어떻게 이 이야기들을 다 잃어버릴 수 있었을까? 그토록 듣고 또 들었음에도…… 그 이야기들의 껍질을 벗겨 게걸스럽게 빨아먹고 핥아먹으며 그날그날의 슬픔과 불안을 잊었음에도…… 세상 곳곳의 유실물 보관함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야기들을 세어본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그 이야기들이 우리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을 것만 같다.

89. 우리에게 지식이, 앎이, 언어가 있었던 덕이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다는 것을 여기 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경험했던 그 모든 어려움조차, 숱한 실패와 좌절조차 이 땅의 어떤 삶들에 비하면 그저 속 좋은 소리였다는 이야기다. 이 몸으로 살 수 있는 여러 버전의 삶들 가운데 우와 나의 삶은 분명 ‘희망편’이었다.

242. 어떤 이들은 과거에 대해 쓰는 이유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반면 나는 과거를 반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우를 떠나며 서른 살이 된 은빈은 이 책 속에서 다시 스뭇 살의 은빈이 된다. 도돌이표처럼 돌아가 다시 우와 살고, 사랑하고, 상하고, 헤어진다. 우와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겪을 일 없었을 깊은 슬픔이 있음에도 나는 분열하고 돌아보고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그 모든 시간 이후에도 여전히 우는 내가 살면서 가져본 가장 좋은 것이다. …… 글에서 우를 들어내야만 했던 것은 나로부터 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이 위에 옮겨지지 않은 우와 우의 삶은 실로 크고 넓고 싶다. 나는 쓴 이가 쓰지 않은 것을 읽는 이도 읽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비워두기로 한 곳을 같이 비워주시기를, 우와 우의 삶을 함께 지켜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책에 우는 적거나 없다. …… 하지만 삶과 사랑이 마음 같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잘못들이 딱히 잘못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저지른 많은 죄들이 여기 어딘가 있음을, 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지도 잊지도 않기 위해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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