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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68. 반희는 이 순간을 영원히 움켜쥐려는 듯 주먹을 꼭 쥐었고,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알려주려는 듯 작게 소리내어 말했다. ___ 스스로에게 소리내어 말하던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스스로에게 꽤 다정하게 군 것이다. ___ 세상은 제각각이니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니 신기하다. 가까이에 있을 것 같은 이야기. 너무 알겠는 이야기들. 나이 들어가는 일이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나이 혼자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억지로 젊고자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는 숫자들만 별개로 번식하는 것 같을 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때도 별거없이 그저 나는 또 하나의 계절을 나고 있을 뿐인 것이겠지.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었다. 주인공의 나이가 몇일까 유독..
이처럼 사소한 것들 20.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 예배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27. 말은 그렇게 했지만 펄롱은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을 겁내는 자기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__ 괜찮다, 별 것 아니다라는 빈 말들이 그렇지 않은 순간들에 성급하게 튀어나와 내 앞에 쌓인다. 나를 거스른 말들은 큰 덩어리가 되어 밤이 될 즈음이면 잠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대단하지 않다 여기고 대충 그렇게 넘어간 것이고 괜찮기를 바라며 애써 그리 말부터 한 것이다. 말의 힘을 믿었..
트립풀 런던 오래전 런던 여행의 마지막에 내셔널 갤러리가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 여행을 준비하던 나의 바람이었는지 이제는 흐릿해진 장면들만 남은, 그 마저도 자꾸 증발하는 중에도 미술관에 대한 기억은 아직 선명하다. 건물의 기둥, 계단을 숨차게 올라 거대한 문 안으로 들어설 때 그곳의 포근한 공기, 볼륨을 낮춘 발걸음 소리, 실제로 보니 사진에서보다 무지 작아 놀란 작품, 고전 미술이라는 작품들을 잔뜩 가지고 원하면 얼마든지 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시샘, 다 돌아보고 싶은 조급함, 문이 닫도록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나를 새겨 놓고 싶던 무거운 발걸음, 벨라스케스 특별전을 놓친 가벼운 지갑, 그런 기억들. 로또가 되면 뭘 하고 싶냐고 물으면 그러면 나는 훌쩍 그곳으로 가 한 달 동안 날마다 들락거리고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59. 나는 별 필요도 없는 긴 이야기를 시작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말하며서 길게 끈다. 어느 누구보다도 형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고, 형도 그걸 너무 좋아하고, 나도 그걸 매우 즐기기 때문이다. __ 오늘의 점심 메뉴, 길에서 본 어떤 장면, 책에서 읽은 문장 때문에 떠올린 생각, 카톡으로 전해들은 황당한 소문, 반쯤은 알아듣지 못하는 각자의 직업 관련한 일들, 쿠폰으로 사 마신 커피, 일하면서 만난 사람, 깜박하고 빼먹은 약.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세세하게, 나의 감정과 감상을 더해가며 길고 긴 이야기로 하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다. 가라앉은 마음을 돌보려고 분주하게 떠들게 되는 시간. 그가 형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병에 익숙해지..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 12. 어떤 글이든 우리가 쓰는 글들은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이에요. _ 초고를, 원본을 남기려 여기 저기 나의 생각이랄지 문장이랄지를 남기는 중인가 싶다. 수정과 개정이 죽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겠지만. 아무도 찾지 않을 자서전, 만듦새에 욕심내지 말고 일단 페이지라도 채워야할까. 누구도 찾지 않을 거라는 가정이 좀 슬프지만 나만큼은 수정을 위해 자꾸 들여다 보게 될 것이므로, 독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 자기 검열의 끝판왕이기보다 언제나 먼저 마음을 열던, 계속해서 쉬운 독자여야 할 터인데. 그 다정한 독자의 마음을 나에게도 주어야 할텐데. 세계의 한계, 마음이 그어놓은 선을 건너가고 싶은 소설이었다. 내 얕은 경험이 자꾸 한계인양, 우물인양 느껴져 글쓰기 위축되곤 하는데. 그렇다고 세계여행만이 답이 아니..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소설은 분명 있지만 잊고 있는 것을 깨우기 위해 정반대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가까이 있기에 돌아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고 큰 숨을 몰아 쉴 때까지 멀리 돌아 걷게 한다. 발견하는 것도 스쳐지나가는 것도 읽는 사람의 특권이다 _ 요즘 청소년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가라기에, 방학을 맞아 쓰윽 내밀어보려고 바로 대출했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각자 읽었지만 책장이 끝나가며 비슷한 반응을 보인 우리는 이 책을 함께 읽은 것이다. _ 주인공의 이름을 묻거나 줄거리를 술술 말하지 않아도, 읽고 돌아서서 정화되는 감정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떤 때는 온전하고 유일한 위로이다. 아이의 삶에 아름다운 문학이 남길 바란다. 방학답게 아직도 쿨쿨 자고 있는 무소속 청소년을 어째야 싶다가도, 책의..
come from away 컴프롬어웨이 911테러가 났을 때 미국의 하늘길은 문을 닫아 걸었고, 어디로든 착륙해야 했던 비행기들은 캐나다의 작은 도시 갠더로 들어가게 된다. 벌어진 현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한채 낯선 땅에 내려야 했던 사람들과 비극적인 재앙에 자신들의 공간과 수고를 내어준 사람들이 겪은 감정과 상황, 그리고 그들이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극을 이룬다. _ 뉴스에서 반복되던 끔찍한 장면에 막연한 두려움이 커져갔고, 주변을 경계하느라 어깨가 뻐근했다. 911 테러는 아직도 어제일 같은데. 사고 희생자와 소방관, 건너건너 아는 유명인들의 사연 말고는 다른 이야기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품을 보면서 그 날 24시간을 넘기며 하늘 위에 떠있었던 사람들, 나처럼 먼 나라의 비극에 눈물짓던 사람들, 그들..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질문. 나라면. 1. 시간 여행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거로 갈 것인가 미래로 갈 것인가 2. 나선형 시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가 3. 미래를 알기에, 누군가의 삶에 개입할 것인가 4. 개입의 근거는 주관적일텐데 책임은 어디까지 질 수 있을까 5. 사랑하니까 하는 거짓말은 어디선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_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일이 있으니 과거로 가는 것일테고, 지금 이대로 괜찮다는 격려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미래로 가는 것일테다. 과거쪽으로 기운다. 아이는 당연히 미래로 간다던데. 시간이 자꾸만 물러나니, ‘내일’을 예측하는 것도 ‘오늘’을 기록하는 것도 의미 없어지고만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원인과 결과가 나란히 늘어서고, 벌어진 일의 이유를 알고나야 일단락이 짓고 넘어갈 수 있는 나는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