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이야기/2016-2020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소설을 읽는 동안
내가 가진 감각이며, 살면서 알게된 것들 모두를 동원해 상상한다. 배경을 그리고 주인공을 세우고 하면서 말이다. 백 사람이 읽었다면 백 개의 세상이 생기는 당연한 이유. 제대로 그리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은 쉽지 않았다. 낯선 언어, 첨 보는(?) 장소, 어려운 소재...
덴마크도 그린란드도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이 언제부터 우리집에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이번에는 번역 후기까지 다 읽었으니 😁 일단 뿌듯한 걸로 되었..다.

작가의 천재성이나 이 책이 갖는 의의는 책소개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합니당!

장편은 보통 50페이지를 전후로 분위기 파악이 끝나 그 때부터 달리게 되는데, 입에 붙지 않는 낯선 언어의 이름들인지라 앞으로 왔다갔다하느라 초반에 기운을 좀 뺐다. 사실 그것도 좀 더 지나니 눈치가 생기긴 하더라만ㅋ 덕분에 제대로 “낯선 나라”를 다녀온 기분이다.

감정이입과 주인공 편들기가 특기인지라 이사야의 죽음에 속이 상했고, 수리공의 존재에 안도했으며, 똑똑한 스밀라의 거침없음을 따라가는 재미에 (어서 끝났으면 좋겠는 중에도) 끝이 보이니 아쉬움이 컸다.
긴박함마저 얼려버리는 빙하의 냉기 덕분에 한밤중 독서엔 가디건이 필요했다.

소설, 낯선 나라.
일단 다녀오면 ‘그 나라’ 가 된다.



_____

55.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다.

126. 카니크, 결이 고운 가루눈.

129. 수리공은 오랫동안 말을 멈추고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 설명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나라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165. 나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한참 걸린다. 공포를 굳건히 지어올리기까지는 순식간이다. 공포를 없애버리는 데는 저녁의 반 정도가 걸린다.

201. 이전에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얼굴과 장소를 마주칠 때마다 점점 자주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아서 세상이 스스로 반복되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 기관에서 조기 노화가 일어나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212. 내가 집에 가는 길에 그 애가 놀이터에 있을 때면, 놀다가 말고 나한테 뛰어옵니다. 그러고는 나와 함께 잠깐 걸어요. 마치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걸 나한테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거기서 멈춰서지요. 그러고 나서는 나한테 고개를 까닥였어요. 그 애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요.

259.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 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내가 카나크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든지 다른 사람에게든지 얘기하기 시작하면 결코 한번도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다시 한번 잃어버리게 된다.

330. 나는 마음속 깊이, 사물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맹목성으로 이어지고,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타고난 잔인성을 가지고 있어서 진심으로 인식하려는 것을 지워버린다는 것을 안다. 오로지 경험만이 민감하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약하면서도 잔인한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노력하고자 하는 시도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378.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밤에는 조용하다. 물론 엔진이 쿵쿵대는 소리, 높고 기다란 파도가 선체 옆을 슥 스치는 소리, 그리고 가끔씩 뱃고물이 50톤의 물을 미세한 액체 가루로 잘게 부수어내는 소리는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정상적인 소리고, 어느 정도 자주 반복되면 고요의 일부가 된다.

401. 그 이름은 모두가 종속되어 있는 시간의 흐름에 닳고 닳아 스밀라로 압축되었다.

'책이야기 > 2016-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도의 말들  (0) 2019.08.28
나의 프랑스식 서재  (0) 2019.06.20
연애의 책  (0) 2019.06.15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0) 2019.05.17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 철학하는 아이  (0) 201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