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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2016-2020

숨결이 바람 될 때

대여섯번 이상은 망설였던 책이다.
장바구니에도 오래 있었고, 도서관 대출 데스크까지도 여러번 가져갔었던. 서가의 자리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어떤 책인지 소개를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 모습 보나마나라며 내려놓았다.


한 번쯤 읽어보면 좋다는 추천이 꾸준히 들려왔고
분위기 좋은 사진의 배경에서 눈에 띄기도 했다.


다시 바람이 매서워진 어제.
반납 알림 메시지를 받고 게으름 피울 수 없어 도서관으로 갔다.

읽을만한 책을 찾다,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인 이 책을 결국 빌렸다.

죽음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자신의 죽음을 글로 썼으니 고통 또한 생생하리라 짐작했다.


제법 손때가 묻은 책 표지를 쓸어가며
가볍게 떠있는 깃털을 바라보며
눈물이 흘러도 담담함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폴 칼라니티의 기록을 들었다.
루시 칼라니티의 기억을 읽었다.
케이티의 행복을 기원한다.



과학자이자 의사이던 그는 작가를 꿈꾸기도 했단다.
그의 삶 전반에 문학이 힘과 위로였다.
깊이를 비교할 수 없지만, 문학의 힘을 믿고 있는 내게 반가운 사실이었고 큰 위로가 되었다.

이따금
늦었다는 생각을 하는 ‘나’는 조바심이 들어,
현재의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린다.
조바심은 버려야겠지만, 지금 이순간이 갖는 가치를 좀 더 절실하게 살려야 함을 배운다.





1부는 그가 남기는 자신의 삶이다.
똑똑한 사람의 선택은 폭이 넓다. 어린 시절의 책이 시작이 된다. 교육은 다름아닌 나중에 무엇을 하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훌륭했다. 의사되기 어렵다 하는 건, 일단 의대가기 어려움에서 시작한다. 수련과정을 듣고 있으니, 의사 선생님들을 더욱 존경하게 된다. 그들이 의사가 되는 동안 극복한 두려움과 끝없는 반복으로 익숙해진 상황들에 경의를 표한다. 의사는 직업이지만, 소명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어려운 공부를 해 낸 의사이면서도 사이사이 등장하는 여러 작품과 그 안의 문장들은 쉼이 되주었다.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삶이다.

2부는 암을 겪는 이야기다.
자신의 병을 아는 것은 어떤 걸까. 과정과 예후를 다 알고 겪는 고통은 더 클까. 무뎌지게 될까. 모르면 더 불안함을 느끼는 입장에선, 완벽에 가까운 지식이 부럽다. 겁쟁이로서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두려움이 더해지는 것이지만. 세상엔 좋은 의사가 많다. 아픈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은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일 아닐까. 그 ‘좋은’ 의사 (혹은 사람)라는 건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다만 나와 맞을 때 그런 사람이 되는 건데. 너무도 간절하게 소원하는 일이 아닐까, 좋은 의사 선생님이 나와 내 병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루시 칼라니티의 글.
그대로 끝나버리면 걱정했을 우리 모두를 위해, 그녀는 힘든 기억과 소중한 순간들을 적어주었다. 고맙게도 스스로 쓰지 못한 폴의 사랑스러운 부분들까지 모두. 아내이자 목격자로서 그의 곁에 있는 동안 둘은 사랑했고, 그 사랑은 살아있는 동안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그런 사랑이었다.

젊은 사람의 죽음을 들으면, 아이가 있어? 하고 묻는다. 아이가 있다고 하면, 남겨진 이들의 삶의 무게가 더 크게 보여 남의 일이 아닌 듯 내 가슴이 철렁했다.
문화와 환경의 차이가 분명 있지만, 케이티를 맞는 그들을 보며 어쩜 서로에게 다행인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떠나는 이와 남겨진 이들에게 그럴만한 삶이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많이 울었다.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일지 알 수 없으나,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마음이 내 안에 자리잡아 삶과 죽음 사이의 그 시간을 담담하게, 애정을 놓지 않고 바라보게 해주리라 믿어본다.







______

P61
나중에 가서야 이 견학이 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로 나를 이끌었다는 점을 깨달았따. 우리는 뇌 덕분에 인간 관계를 맺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뇌는 망가져버린다.
...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삶의 의미와 미덕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인생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적 측면, 즉 ‘인간의 관계성’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뇌와 신체 그 자체의 생리적인 명령에 따라 일어나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P129
환자는 의사에게 떠밀려 지옥을 경험하지만, 정작 그렇게 조치한 의사는 그 지옥을 거의 알지 못한다.


P161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P259
그 후로 폴은 변화의 여정을 걸었다. 그는 의사라는 열정적인 사명에서 벗어나 다른 사명을 갖게 되었고, 남편에서 아버지가 되었으면 물론 마지막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갔다. 나는 폴의 이 여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가 책을 쓸 때에도 곁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P260
이곳이 늘 안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따. 날씨가 종잡을 수 없다. 폴은 산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묻혔기 때문에 그를 찾아갈 때면 땡볕을 쐬거나, 짙은 안개를 헤치고 나가거나, 몸을 따갑게 찌르는 차가운 비를 맞아야 했다. 그곳은 평온하면서도 불편하고, 친밀하면서도 쓸쓸하다. 마치 죽음과 슬픔처럼.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좋고 또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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