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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2024

사라진 것들

62. “왜냐면,” 마야는 돌아서서 부엌에서 나가며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라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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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한 편 은근한 매력이 좋았지만,  <넝쿨 식물>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안 볼지도 모르는 연인에게 제일 좋아하는 그림을 남기는 식의 다소 어이없는 상황들, 상관없는 독자의 시선에서 뭐지?! 혹은 왜지?! 하는 설정들, 그래야 했나 싶은 순간들이 이상하게도 응 아니야를 외치면서도 등을 반쯤 돌린채 그럴만하지 생각되곤 했다.

어릴 때 나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나간 날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던 아이템인 조끼를 건네던,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가 쇼핑을 하고 포장을 해서 입으라고 내밀었다. 그리고 그만 만나자고. 그는 어이없어 했지만 그것까지 하고 싶었던 나를 결국 다 받아주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아름다운 이별은 없으며 헤어짐이란 모름지기 날카로울수록 낫다는 것을 알게되었으니, 그날 그 자리에서 조끼를 찢어 버리지 않은 그는 더 많이 사랑한 죄로 더 아팠겠지. 아픔까지도 아름답길 바라던 순수를 실천하던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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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갈 때,
길을 걷다 무심코 들여다 본 건물 안의 누군가가 익숙한 얼굴일 때,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소란을 밀고 나를 눌러오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
어제도 자고 일어난 잠자리를 정리하는 일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때.

익숙한 일상에서 나만이 감각하는 기이한 순간들이 있다.
나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구나 싶은 (그래서 신나는) 소설들.
요란하지 않게 소란하지 않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순간들의 이야기.

한 달 내내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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