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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보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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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낮으신 로마에서 페루자로 달리던 기차에서 작고 하얀 아시시를 멀리 두고 보았다. 어딘가 묵은 사진 폴더에 하얀 벽돌 사진이 있을텐데. 당시의 피곤함, 긴 시간 이동하며 쌓인 여독을 잠시 모른체하며 미뤄두는, 그래서 언제 또 그곳을 찾게될지 모르니 힘을 내어 걸어보는, 성실한 여행자의 노련함도 경험을 풍요롭게 부풀릴 호기심도 그 시절의 나에겐 없었다. 이후로 종종 책, 그림, 흘러드는 이야기 속에서 아시시를 만나고 그 때마다 아쉬움이 들곤했다. 그 기차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목적지 도착 시간이 조금 늦어지고, 두 배로 고단했겠으나 이후의 순간들에 얼마나 많은 감동이 덧입혀졌을까. 가지 못한 길은 영원한 아쉬움이 되어 어떤 기억보다도 강렬하게 살아남는다. 프란체스코 (오늘 설교에도 등장! ) 한 사람의 생애가 시로..
가벼운 마음 수많은 이름을 건너며 나를 떼어놓기, 나로 부터. 어떤 이름은 쓰며 지낼만하고 또 다른 이름은 영원히 그립다. 평생 하나의 이름으로 사는 일은 자신을 세상에 각인하는 성실한 방법이지만, 그 시작이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음이 내심 걸린다. 문 밖을 나설 때마다 달랐던 소녀의 선택은 신선했고 후련했다. 어떤 이름으로 기억할지 정할 수 없으나 무엇으로든 충분히 남겨지는 존재다. 늑대의 으르렁거림이 지켜낸 첫 밤처럼 아슬아슬하지만 온전하기에 다시 없을 시간들을, 이야기들을, 한 글자도 눈에 들지 않던 역병과 함께한 일주일을 끝내고서야 몽롱한채로, 허겁지겁 읽었다. ‘이름’은 오랜 화두다. 책 전체가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된다. 네 번째 보뱅이다. 나는 올해야 그를 만났는데, 그는 ..
환희의 인간 관념적인 문장은 뜬 구름 같아서 그 위에 떠 있는 동안 쉼을 누리는 것만 같아 일상의 익숙한 장면을 새삼스레 바라보게 하는 감각적인 문장들도 가득. 세 번째 보뱅이다.
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의 두 번째 책. 서둘러 책장을 넘기고 싶은데, 스쳐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눈길을 잡아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마음은 급하고 손은 느리게 움직이던 시간. 너무나 구체적이고 세세한 기억인데, 그 어느 것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일상이 정원에 가득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손끝 감각에 살아 숨쉬는 고스란히 걸려있는 현재이고마는 기억들. 글 속에 새겨진 그녀의 삶은, 사랑 그 자체가 된다. 분명 완전하지 않았을 그 사람은 기억 속에서, 그리움 안에서 온전하게 다시 태어난다. 글로 내가 남겨지는 상상을 해본다. 실은 나의 오랜 바람이고, 꿈이었다. 한 때는 그랬다. 내 시간의 끝이 더이상 달라지지 않게 되어도, 나의 이야기는 나이를 먹어가는 상상. 지슬렌은 어떨까. 떠난 이에겐 실은 ..
작은 파티 드레스 ‘처음부터 우리가 책을 읽은 건 아니다’ 강한 부정인듯 느껴지는 문장이 사실은 피할 수 없는 강렬한 긍정의 의지를 담고 있다. ‘우린 기다린다. 사랑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 무언가를 통과해 완성에 이르기를 지켜본다. 온 몸의 감각을 한 곳으로 모아 읽어야 하는 문장들이었다. 여러번 읽어도 나아가기는 더뎠다. 밑줄을 모아 다시읽으니, 그 이유는 나에게 남은 기다림의 흔적과 변명이 키운 환상 때문이었을까 한다. 사랑에 관해 길고 깊은 글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언젠가 했었다. 남녀간의 사랑을 넘어, 내가 아는 사랑만이 아닌, 세상의 사랑을 모으고 해체하고 싶다는 바란적이 있었다. 그 일을 시도하기엔 아직도 이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