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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2016-2020

쇼코의 미소





책 읽다 소리내서 엉엉 울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눈물이 많고 툭하면 울기는 해도
언젠가부터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슬프고 서러운 문장을 만났기 때문도 아니었다.

몇 번의 울컥거림이 턱까지 차올랐다.
물을 마시고, 자리를 옮기고, 자세를 바꾸고 하며
잘 넘겼다.
여덟살 아이가 한글을 가르치는 즈음이었던 것 같다.
티슈 박스를 들고 들어와 앉은 때가.



내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소유의 할아버지를 보내며 비로소 나는 내 아버지에 대해.
뜨개질한 모자를 선물하던 그녀의 엄마를 보며 나의 엄마에 대해.
이제는 한 번쯤 생각을 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했다.
소설을 통해 그들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미 나의 부모로부터 한 발 떨어져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해 적어도 한 번은 공평한 입장을 보여야할 것 같아서.



소설가들이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은 멋지다.
최근에 읽은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두 편의 존재가 고마웠다.



곱고 맑다.
공감과 감동의 힘이 내내 나를 울게했다.
울어버리느라 시야가 흐려져 문장 끝이 읽히지 않는 것이 속상할만큼 나는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소유와 쇼코, 우드스탁, 해옥과 순애언니, 영주, 미진과 소은 그리고 율라, 미카엘라들과 지민이. 그 이름들 속의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남긴 '나'


그들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도 남겨졌다.

---


꿈을 꿈으로 두고 살던 나의 시절을 이제 그만 접으려한다. 나는 다른 물음표를 가지려 한다.
다른 물음표를 찾아가는 중에
많은 책들, 이야기들, 문장들의 도움을
이렇게 또 받는다.





쏟은 눈물때문인지
종일 마시려고 우려놓은 차를 두어 시간만에 다 마셨다.
다즐링을 마실 때면 쇼코의 미소가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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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창작이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고, 나로부터 나를 새방시킬 것이고, 내가 머무는 세계의 한계를 부술 것이라고 생각했찌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늘 돈에 쫓겼고, 학원 일과 과외 자리를 잡기 위해서 애를 썼으며 돈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  영감은 고갈되었고 매일매일 괴물같은 자의식만 몸집을 키웠다.  ...... 영화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나 자신도 설득할 수 없는 영화에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건 착각이었다. ......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 먹어간다. 



69.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74. 아줌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몰랐던 엄마의 좋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고 엄마가 내 엄마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졌다. 

85.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이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115.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잇엇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143.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내 이야기는 세상으로 퍼질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한지가 그 이야기들로 나를 판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컸다. 부끄러운 기억들도,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일들도 한지 앞에서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서도 할 수 없는 말들을 한지에게 했고, 그 이야기는 그애에게만 속해 있다. 

150. 우리는 그전처럼 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짧으면 몇 초, 길면 몇 분 정도 말없이 가만히 걷기만 했고, 길가로 기어나온 민달팽이를 주워서 풀숲에 던졌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내가 얼마나 그 시간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 시간은 영원해야 했다. 다른 시간들처럼 함부로 흘러가버려서 과거 속에 폐기되어서는 안 됐다. 



204. 비가 그치고 성당을 나와서 우리는 폰탄카 운하까지 걸어갔다.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이 지나갔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배를 탄 사람들은 육지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걸까. 


217. 엄마의 감사 타령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엄마의 초라한 현실을 봤다. 언제든 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런 일에 감사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 그녀는 차라리 엄마가 스스로의 처지에 솔직해져서 불평하기를 바랐다. 초라한 현실에 대한 엄마의 감사가 얼마간은 기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250.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여덟 살짜리 애가 어른을 앉혀놓고 가나다라를 가르쳤다는 사실이. 말자의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지민은 설명을 잘했다. 틀렸다고 무안 주지도 않았고 빨리 이해하지 못한다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틀린 것은 기억해뒀다가 다시 묻고, 답이 맞으면 칭찬해줬다. 

254. 말자는 지민의 손을 잡고 병원 바깥으로 걸어갔다. 지민이 울 때면 말자는 그애와 같이 산보를 했다. 바깥공기도 쐬고, 변하는 풍경도 보고 하면 서러운 마음이 잦아든다는 것을 말자는 알았다. 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믈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야야, 지민아, 너 마음 쓰지 말어.”



277(서평) 힘은 힘이되 누구도 해칠 수 없어 보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힘, 압도적이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힘이다. ......그들은 대체로 희미하고 조용한 사람들이고, 삶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우울과 슬픔 속에서도 서로 간의 유대와 공감의 끈을 놓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정감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한데 모이니 그것이 힘으로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최은영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거칠고 단단한 것만이 아니라 순하고 맑은 것도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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